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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인 기업가로부터 경영을 배운다 2
등록자 CARLNC 작성일자 2007-09-14 오후 5:30:47


         세계를 움직인 기업가로부터 

                   경영을 배운다

소규모이든 대규모이든 하나의 업체를 운영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불황의 늪에 빠져 탈출구를 찾지 못하는 경영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책을 하나 소개한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창업가들의 삶을 통해 askg은 것을 느끼고 새로운 의욕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이 책은 『세계를 움직이는 기업가에게 경영을 배운다』다. 40여명의 기업인을 소개한 가운데 중 일본 최강의 기업 도요타에 대한 글만 발췌한다

일본 최강의 기업, 도요타

2003년 11월 5일에 도요타자동차가 발표한 9월 중간 연결결산(미국회계기준)을 보면,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8% 증가한 8조2천242억엔, 경상이익도 13,7% 증가한 8천120억엔에 달해 최고로 좋은 실적을 거두었다. 다시 후반기에는 후생연금의 금리 대행분이 되돌아와 2003년 3월의 경상이익은 1조2천억 엔을 상회했다. 도요타자동차는 연간 15조 엔이 넘는 매출액과 2조 엔에 달하는 경상이익을 올리는 글로벌 기업으로, 이미 2001년도에 세계 기업 중에서 매출 제9위, 순익 제12위에 랭크되었다.(금융부분은 제외)
일본 기업 중에서는 두 부분 모두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자동차 판매대수에서는 미국 GM의 연간 854만대, 포드의 698만대에 이어 617만 대로 3위이지만(2002년도), 2003년 4월에서 9월까지는 다시 포드를 제치고 2위로 약진하고 있다. 더구나 북미를 비롯한 해외에서의 판매가 3분의 2를 차지해 글로벌 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렇게 도요타가 글로벌 기업을 빠르게 성장하자 미국의 경제잡지 <비즈니스 위크>지는 ‘도요타를 멈추게 할 수 없을까?’라는 제목으로 8페이지에 달하는 특집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도요타는 ‘일본의 발명왕’ 도요타 사키치와 그의 아들 기이치로가 창업한 회사다. 도요타 사키치는 1890년(메이지 23년) 도요타식 목제 인력직기를 완성하고 자동직기 발명에 전 생애를 건 인물이다. 한편 기이치로는 1937년 도요타 자동차공업을 창업한, 일본자동차 산업의 개척자다. 이 회사는 지금도 도요타 일가를 중심으로 막강한 단결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본사는 아이치 현 도요타 시에 있는데 도요타 자동직기,아이치 제강, 도요타 공기, 도요타 차체, 아이신 정기, 도요타 방직 등 계열회사를 14개 거느리고 있으며 종업원은 무려 25만명에 달한다. 현재의 회장 오쿠다 히로시와 사장 조 후지오는 도요타가 출신이 아니다. 그러나 전무인 도요타 아키오를 비롯해 도요타 일가는 관련 기업의 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들은 일사불란한 노사협조 팀워크를 이루며 강인한 결속력을 보여주고 있다.
도요타의 라이벌로 알려진 혼다도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이름을 회사명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세습을 꺼린 혼다는 자식들을 자기회사에 투입하지 않고 있다. 도요타와는 대조되는 부분이다. 자동직기의 발명와 도요타 사키치와 자동차 산업의 개척자 도요타 기이치로의 창업정신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지금 어떻게 계승되고 있을까?

일본의 발명왕, 세계의 엔지니어

도요타 사키치의 생애는 오직 발명 한 길뿐이었다. 1890년에 신청한 도요타식 목제 인력직기로부터 시작해 전 생애를 통해 취득한 발명특허가 84건, 실용신안이 35건에 이르며 외국특허도 13건이나 획득했다.
그는 일본의 직물산업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면서 일본 기술을 발전시키는 선두주자가 되었다. 더구나 겨우 초등학교를 마친 학력으로 혼자 이루어낸 그의 개발정신은 여하튼 해보자하는 현장주의, 현물주의로도 유명한 ehdyuxk 정신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도요타 사키치는 1867년 시즈오카 현 고자이 시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목수일을 가업으로 하는 이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은 미카와의 동부에 있는 도요하 시에 근접한 지역으로 예로부터 엔슈, 미카아를 비롯해 목면직물업이 성행했다. 이러한 재래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사키치는 기술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큰 회사들은 많은 자본을 투자해 서구에서 도입한 근대기술로 공업화를 추진했지만 사키치는 자신의 힘으로 개발하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평소 자신이 하는 목수일에 성이 차지 않은 사키치는 오로지 독학으로 목면수직기(木綿手織機)를 개량하여 동력으로 움직이는 역직기를 개발하는데 열중했다.
1885년에 공포된 전매특허조례에 크게 분발하고 있던 사키치는 5년 뒤 봄 도쿄 우에노에서 열린 제3회 국내산업박람회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는 이 전시회에 출품된 서양의 기계들을 보고 더욱 지긱 개량에 박차를 가한다.
그해 11월에는 오른손으로 끈을 잡아당기면 베틀이 자동으로 좌우로 움직이면서 실이 들어가고 왼손으로는 세로실의 위치를 조정할 수 있는 배튼 직기를 개량해 도요타식 목제 인력직기를 고안했다. 1894년에는 손으로 돌리던 것을 발로 밟는 방식으로 개량해 능률을 두세 배로 향상시킨 가세구리기를 내놓아 주목을 받았는데 이것은 솜이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잣는 기계다.
1896년에는 도요타식 목철 혼제 동력직기를 발명했다. 그는 최초의 일본제소폭동력직기를 주로 중소 직포업에 공급해 재래기종의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다시 소폭용 철제 동력직기를 개발하고 나서 본격적인 광폭용 철제 동력직기를 개발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1905년에는 세로실 공급장치가 붙은 38년식을, 다음해에는 더욱 견고한 39년식과 비교적 값이 싼 경사직기를 개발했고 1909년에는 경사 셔틀을 슬라이더로 미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자동셔틀교환장치를 발명했다. 그리고 이들을 집대성하여 1924년에는 세계 최초로 무정지식 G형 자동직기를 발명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완전 자동직기의 발명은 국제적으로도 큰 주목을 받아 1929년에는 세계적인 방직기 제조회사인 영국의 플랫사로부터 당시 돈으로 1백만 엔이라는 거액의 사용료를 받고 특서 양도계약을 맺었다. 이 때 받은 1백만 엔은 도요타 자동직기제작소의 든든한 자본금이 된다. 국산 기술을 해외로 수출한 이 계약이 성공하자 사키치는 세계의 직기왕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기술 개발 그 자체도 어려웠지만 개발 후 역직기의 제조 및 판매나 직포업의 경영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업의 수익 문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사키치에게는 앞으로 연구개발 자금을 확보하느냐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절실한 문제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 시장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미쓰이물산과 일관방직 시스템을 바라던 방직업계로부터 개량역직기에 주목한다. 1899년 나고야에 이게타 상회, 1907년에는 도요타식 직기주식회사가 설립된다. 그러나 직기를 대량생산하려는 경영진과 자동직기의 발명을 염원하는 사키치는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결국 1910년에 사키치라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다.
좌절감과 실의에 빠져 서구의 방직기 시찰에 나선 사키치는 귀국 후 다시 독립을 결심하고 1911년에 도요타 자동직포공장을 설립해 1914년부터 방직업에 진출했다. 1918년에는 도요타 방직주식회사로 발전시켜 츄쿄 지구의 유력 방직 메이커가 되었다. 사키치는 1921년 중국 상하이에 도요타 방직창을 설립한다. 1926년에는 주식회사 도요타 직기 제작소(현 도요타 직기)를 현재의 가리야 시에 설립할 정도로 사업이 급성장한다. 이 사업에서 얻은 수익을 투자해 획기적인 무정지식 셔틀교환자동직기 발명의 개발자금을 마련했다.

대중차의 국산화에 꿈과 정열을 쏟다

상하이의 방직공장 건설에 착수할 무렵인 1921년에 도쿄제국 대학 공학부 기계과를 졸업한 장남 기이치로가 도요타 방직에 입사했다. 그로부터 6년 전에는 미쓰이 물산 나고야 지점장 고다마 이치조의 동생으로 이토추합명회사의 마닐라지점 지배인을 역임한 리 사부로가 기이치로의 이복여동생 아이코와 결혼해 사키치의 데릴사위로 도요타가에 입적한다. 그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뛰어난 경영수완을 발휘하며 회사의 발전에 톡톡히 기여했다.
대학을 졸업한 기이치로는 입사하자마자 리 사부로의 지원을 받으며 방직사업의 확대와 자동차의 국산화를 견인하게 된다. 자동차 사업에 참여한 계기가 독특하다. 1910년 유럽 시찰에서 자동차 시대를 절감한 사키치가 “나는 직기를 만들어 나라에 공헌했으니 너는 자동차를 만들어라!”는 꿈을 아들에게 전하면서부터다. 기이치로가 1929년에 플랫과 G형 자동직기 특허권 양도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구에 추장을 다녀왔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기이치로는 자동차가 서구의 거리를 누비는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 남몰래 자동차 국산화의 결의를 다졌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당시 일본에도 자동차의 실용성과 유용성이 인식되었다. 승용차, 트럭, 버스 등이 급속도로 수입돼 자동차 보급이 착착 진행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 포드와 일본 GM 이 외국에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한 자동차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국산차의 생산은 닷트 자동차 제조회사가 시도하고 있는 정도였다. 일본 정부에서는 ‘전쟁 병기의 근대화와 고도화’라는 목적에 맞추어 군용차량의 국산화를 먼저 서둘렀다. 그러나 기이치로는 자동차 사업의 최종 목표를 군용 차량이 아닌 포드나 시보레와 같은 대중차에 두고 불굴의 의지를 다지며 자동차 국산화의 한 길에 매달렸다.
1933년에는 도요타 자동직기 제작소 내에 자동차부를 설치하고 다음 해에는 임시주주총회에서 자동차 사업 진출을 정식으로 결정했다. 1935년에는 A1형 승용차와 G1형 트럭의 시작차 완성에 성공한다. 물론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기술적으론는 엔진을 비롯해 각종 부품개발에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불확실한 가운데 거액의 돈을 계속 쏟아 붓고 있었으므로 친족이나 회사 간부 그리고 주주들이 자동차 제작에 의구심을 나타냈다. 그러는 중에도 기이치로는 자동차 기술이 뛰어난 수가 다카도시와 오노슈지 등을 맞아들여 본격적인 기술팀을 편성하는 한편, 양산화를 위해 가리야에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고로모초에 약 60만 평의 광대한 공장부지를 얻는 등 사업을 진척시켜 나갔다. 도 판매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가미야 쇼타로를 일본 GM의 오사카 본사에서 발탁해 왔다.
다행히 1936년에 공포된 자동차제조 사업법에 의해 도요타는 닛산 자동차와 함께 허가회사로 지명되었다. 이렇게 자동차 사업의 전망이 밝아지자 1937년 마침내 도요타 자동차공업주식회사가 탄생했다. 초대 사장에 리 사부로, 기이치로가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다음 해에는 월 자동차 생산량 1천5백 대를 1차 목표로 고모로 공장을 준공했다. 이것은 주물, 단조, 도금, 차체, 프레스, 기계, 도장, 조립의 각 공장과 삼소, 연구시설,M 후생시설 등을 완비한 일본 최초의 일관제조공장이다.
생산공정에는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을 철저히 도입했다. 드디어 대중차 국산화를 향한 꿈이 그 발판을 마련했지만 중일전쟁 발발 이후의 전시체제 하에서는 승용차 제조보다는 군용트럭 생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 전쟁에 돌입한 1941년 도요타의 차량생산 대수는 트럭과 버스 1만 4천403대에 승용차는 겨우 208대에 불과했다. 이 해 가아치로는 사장에 취임했지만 승용차 국산화는 전쟁이 끝난 후로 미루었다.
194년 8월 15일 패전을 하루 앞두고 공장시설과 기계설비의 수복에 착수했다. 전후의 혼란이 극심했지만 2년 후에는 SA형 소형 승용차, BM형 소형트럭의 생산이 궤도에 올라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영호나경은 여전히 혹독했다. 1949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후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 사령부가 재정금융긴축정책 ‘돗지 라인(Dodge Line)'을 선언한다. 이에 다라 자동차 산업은 수요의 격감 자금조달 악화로 2중의 타격을 받았다. 이 타격으로 도요타는 종업원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1천6백명을 해고하면서 파업이 장기화되었다.
결국 1950년 기이치로의 사퇴로 노사분규는 겨우 수습되었지만 도요타 자동차는 존폐의 위기에 부딪힌다. 다행히 한국전쟁 후 경기가 회복되면서 회생할 기회를 잡는다. 한국전쟁으로 군용트럭의 주문이 밀려들어 그나마 na통을 터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결국 이루지 못한 채 기이치로는 뇌일혈로 1952년 57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둔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대중에게서 사랑받는 차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그가 세상을 든지 3년 만에 도요펫 크라운의 완성으로 이루어진다.
자체 기술 개발 방식으로 대중차를 제조한다는 기이치로의 경영전략은 역사 격류에 휩쓸리면서도 훌륭한 결실을 보았다. 이후 1957년에 코로나, 1966년에 카롤라를 판매하면서 도요타 자동차는 견고한 위치를 쌓아간다. 특히 카롤라는 1974년에 단일차종으로는 세계 제1위의 판매량을 기록하는 자동차로 성장했다. 이 사이에 고로모는 1951년에 시로 승격되고 1959년에는 도요타 시로 이름이 바뀌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도요타 자동차의 거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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